캠벨은 어릴 때 부모와 함께 봤던 공연에서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인디언을 본 이후 인디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인디언 문화는 그 공연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지만 어린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고, 이후 집 근처 도서관의 관련 서적을 모조리 읽어 치워버렸단다.
15세 때 집이 모두 불타는 화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뒤인 스무 살 때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다. 거기에서 인도 청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우연한 교제를 시작하면서 인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5세에 인도철학과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해 온 학위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5년 동안 독서,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그렇게 보낸 5년 동안 그는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익어갔고, 그 특별함은 평생 그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내내 나는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일부러 멀리까지 데려가 보여준 공연에서 아이는 주제와는 상관없는 부분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것도 하필이면 미개한 인디언한테. 뭘 배울 게 있다고 저러는 걸까.
살던 집과 어머니를 잃은 화재 사고가 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을 감행한 부부. 어렵게 떠난 여행에서 아들은 인도인 청년과 죽이 맞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좀 더 유리한 경력을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귀국해선 별안간 인도철학과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결국은 학위도 못 받고 대학을 나온다. 그리고 내리 5년을 빈둥거린다. 암흑 같은 대공황. 그러게, 학위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든 강사 자리라도 얻었으련만.
만일 캠벨의 부모가 인디언에 꽂혀있는 아이를 나무라고, 잃어버린 재산을 만회하느라 가족여행은 엄두도 못 낼 만큼 조급해하고, 네 미래를 위해서라며 학위는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거나, 엄마 아빠 친구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다 직장 잡아서 사람 구실 하고 사는데 너만 왜 이렇게 까탈을 피우냐며 다그쳤더라도 우리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나란히 잠들어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 내 새끼들. ‘나 정말 태어나길 잘한 거 같아’ 하는 살아 있음의 느낌. 하지만 그 미소 끝에 큰 인물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달리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들이 캠벨만큼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준다면 충분하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부모만큼만 할 수 있음 되는 거잖아. 그의 부모만큼이란? 적어도 그에 관한 기록의 뒤에 서 있는 그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의 스케치북을 넓혀주려고 노력하되 무엇을 그리는지에 대해선 철저히 아이를 믿어주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면서 꿈을 키워갈 수는 없는 걸까?
시간에 쫓기는 거 질색이다. 아무리 즐거운 아이템도 넘어가는 초침 소리와 함께라면 끔찍한 고문이 될 뿐이다. 나는 나를 매우 사랑하는 편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고문하는 멍청한 짓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최상의 성과물을 얻으려면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몸으로 태어났지만, 최고를 얻기 위해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것까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체로 쿨하게 좌판을 접고 자리를 떠나며 뒤도 안 돌아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내게도 예외의 영역이 존재한다. 바로 아이들.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구원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 자면서도 웃었다. 온몸의 세포가 우주의 기운을 받기 위해 활짝 열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35년 만에 처음으로 뼛속까지 기뻤다. 이런 상태를 평생 유지할 수 있으면 된다는 거 아냐? 아싸~!!
연구원이 될 수 있다면 승진쯤은 다시는 못한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었다. 남편도 행복해하는 내 모습이 좋다며 아직 긴 밤잠을 잘 줄 모르는 여덟 달짜리 딸아이를 다른 방에서 데리고 자주기까지 했다. 다섯 살짜리 아들 녀석은 제법 말귀를 알아들어 ‘엄마 공부할 때는 혼자서 놀 줄도 알아야 형님이지!’ 하며 의젓하게 굴어줬다. 그렇게 완벽했다. 직장 다니면서 난생처음 써보는 서른 페이지짜리 개인사를 마감 일주일 전에 끝낼 수 있었던 것도 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딸아이는 할머니 품에 아빠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엄마 얼굴에서 슬픈 눈을 떼지 못한다. 게다가 어린 것이 감기 기운까지 있어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데다 귀여운 얼굴은 누런 코딱지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섯 살짜리 아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엄마가 있는 걸 확인하고야 다시 잠이 든다. 서재에서 공부하고 있을 땐 제 이불을 질질 끌고 와 책상 아래 잠자리를 만든다.
모진 엄마. 눈물이 그렁그렁.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신화와 인생』과 컴퓨터가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이게 뭐야. 인생의 ‘희열’을 찾았다면서. 나의 희열을 위해 내 아이들의 ‘희열’을 희생해도 되는 거야? 뭐야.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신화? 내게 신화란 뭐냐고?
나의 신화를 위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지? 아이들에게 엄마가 차가운 그리움의 이미지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야 한다는 거지?
주르륵.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이건 아냐. 어떻게 찾은 꿈인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내게 제일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그렇게 아이들을 꼭 껴안고 누운 베개는 젖어갔다.
엄마가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훈이, 영이에게
엄마가 새벽마다 기쁨의 욕조에 발을 담그면 엄마의 가슴에선 행복의 카나리아가 여행을 준비한대.
그리고 엄마의 몸이 기쁨의 물방울 속에 흠뻑 잠기면 그 카나리아는 힘차게 여행을 떠나는 거래.
우리 훈이, 영이 꿈속으로 날아가 엄마랑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하는 너희들 곁에서 노래를 부른다는구나
그러니까 어디선가 카나리아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면 엄마가 기쁨의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거겠네. 그럼 새만 오고 엄마는 안 와?
아니지. 엄마가 오기 전에 엄마의 기쁨을 먼저 보낸 거지. 기쁨이 노래하면 세상은 아름다운 빛으로 넘쳐난단다. 정말 예쁘겠지?
어...엄마. 정말 좋겠다. 엄마 그럼 훈이랑 영이는 카나리아랑 놀고 있을테니까 목욕끝나면 엄마도 빨리 와야해.
그럼.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럼...그러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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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여인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직접 지은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새벽빛에 꿈에서 깨자, 어느새 눈물은 간데없고 연둣빛 카나리아의 날갯짓만 나를 기다리고 있다.